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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대표선교사 (2019-10-30 07:33:42, Hit : 41, Vote : 1)
제        목  
   ★<아침묵상>히브리서 강해!(1-6장)
오늘부터 히브리서 묵상을 나눕니다.


대표선교사
 ::   구약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히1:1-3)
◆본문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해석과 설명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1절)
‘옛적에’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이후의 시대를 말하는 2절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와 대조되는 말로서 구약 시대를 가리킨다.
‘선지자들을 통하여...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우리 조상들’은 본서의 수신자인 개조안 유대인들의 조상인 구약 시대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선지자’는 비단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등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받으며, 그 말씀을 사람들ㅇ게 전한 자들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여러 부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메로스’는 ‘여러 번’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단 한번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계속적으로 계시를 주신 것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여러 모양’이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계시를 주셨던 여러 가지 다양한 방편을 가리킨다. 다시 정리하면 ‘여러 부분’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며, ‘여러 모양’은 유월절기, 제사의식, 제물, 성막, 노아방주, 요나의 물고기, 불뱀등 예표적 사건들을 말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
1절의 ‘옛적에’와 대조되는 말로서 여기서는 신약 시대, 즉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표현은 보다 좁은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즉 신약 시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시점을 뜻으로 성경 다른 곳에서는 ①‘말세’(행2:17, 딤후3:1, 벧전1:20) ②‘그리스도의 예수의 날’(빌1:6) ③‘주의 날’(살전5:2, 살후2:2)등으로 표현되었다. 본문에서는 신약 시대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그리고 보다 명확하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음을 나타냄으로써 구약과 신약간의 연속성 및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즉 이 땅에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격과 사역, 교훈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셨고, 또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스스로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것이다. 한편 본서의 저자가 이같은 사실을 본서 서두에서부터 강조한 이유는 기독교를 비난하고 박해하는 당시 유대교도들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 즉 저자는 유대교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구약 성경이 실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계시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언급함으로 기독교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고 박해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상속자’란 가문의 대를 잇는 아들을 가리키는데 이 이들에게는 법적으로 재산 상속권이 부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근본 하나님이시자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부여 받으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같은 신적 영광을 버리시고 얼마동안 사람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셨다. 그러나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본래의 신적 영광을 회복하심으로 만물이 그 발 앞에 복종하게 되었다(빌2:5-11).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가 되었다는 앞 문장의 언급의 타당성을 밝힌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의 상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자임을 강조함으로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소유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는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고 증거 한 내용과 그 맥을 같이 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그리스도의 칭호다(요1:1). 이같이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소유하시고 그것을 통치하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절)
<본 절은 그리스도께서 ㅅ하나님의지으신 만물의 상속자이시며 또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심을 언급ㅁ한 데 이어(2절) 그분의 신적 영광과 사역에 관해 언급하는 구절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본래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을 뜻한다. 다음으로 ‘광채’는 헬라어로 ‘아파우가스마’로서 신약에서 이곳에만 언급 된 단어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발광채’ 그 자체가 발하는 ‘빛’이라는 의미이며, 둘째는 외부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그리스도께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하나님으로서 신적 영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자, 또한 성육신 하셔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 교훈들을 통해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서 ‘형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라그마’ 역시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언급된 단어로서 ‘원형을 그대로 묘사한 조각품이나 초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 말은 본체 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지니고 계심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즉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완전히 일치하는 한 분이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도 친히 증거하신 것으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0:30)고 하셨으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고 계심을 증거 하는 구절이다. 즉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때 재료를 통해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의 말씀만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것처럼(창1:3)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신적 권능으로 피조 세계를 다스리며 섭리하고 계신 것이다.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친히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은 영원하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에 참여하는 자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매일 드렸던 것과 같은 속죄 제사가 다시는 필요 없게 되었다. 이는 곧 본서의 핵심 주제로서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수행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히9:11-26).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육신 사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표현은 시110:1의 반영이다. 여기서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 하늘을 의미하며, ‘지극히 크신 이’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편’은 고대 근동에서 영광과 능력,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곧 하나님과 동등한 위엄과 영광의 신분을 지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셨던 신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요약/적용
◦구약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그리고 보다 명확하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간의 연속성 및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가 이같은 사실을 본서 서두에서부터 강조한 이유는
기독교를 비난하고 박해하는 당시 유대교도들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
유대교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구약 성경이
실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계시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언급함으로
기독교의 정통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아멘!
 [2019/10/30   

대표선교사
 ::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히1:4-9)
◆본문
4.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6.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해석과 설명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4절)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
저자는 이제 구체적으로 천사들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저자가 모든 피조물 중 특히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강조한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천사를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보며(갈3:19), 심지어는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골2:18)에 대하여, 천사보다 그리스도께서 월등히 우월한 분이심을 논증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믿음을 견고히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브리인에게 있어 각 존재의 고유한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서(5절), 이는 그리스도에 비교될 만한 다른 존재들이 없음을 시사해 준다. 이처럼 ‘하나님 아들’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1-22)하셨다고 언급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뛰어남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5절)
본 단락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증명을 위해 구약 말씀을 인용(7개)하여 논증하는 부분으로, 본 절에는 7개의 구약 인용구 중 두 개의 인용 구절이 있다.
①‘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본래 이 말씀은 다윗 언약(삼하7:14)에 근거하여 시편 기자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자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왕의 대관식 때 이 말씀은 자주 낭송되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②‘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7:14)
이 말씀은 본래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할 의사를 표명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이 아닌 ‘솔로몬’이 하나님의 친밀한 아들이 되어서 성전 건축을 하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궁극적으로 메시야 예언으로서 장차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첫 번째 인용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 두 번째 인용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아버지되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와 같은 아버지와아들로서의 친밀성은 천사와 하나님 사이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6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강조한 앞 절에 이어 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저자의 천사들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간의 차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즉 천사들은 경배를 받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경배하여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본 절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마땅히 경배 받으실 만유 가운데서 우월하신 분이라는 점이다>
‘맏아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상속자’(2절)이심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에 적용되기도 했지만(렘31:9),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으신 천지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지니고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초림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재림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초림과 재림 모두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것은 비단 재림시에만 있을 일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초림시에도 있은 일이기 때문이다(눅2:8-14). 즉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으로서 항상 하나님께 수종들기 위해 창조된 천사의 찬양을 받는 것이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7절)
본 절의 인용은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104:4)의 말씀이다. 본문의 인용구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천사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들이며 사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즉 여기서 ‘바람’과 ‘불꽃’은 능동적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피동성을 지닌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와는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8-9절)
<본 단락은 시45:6-7을 인용으로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에 비할 바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지위에 대하여 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종의 위치에 있지만 아들은 만유를 통치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공동 번역은 본 절을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왕권은 영원무궁하시며’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 ‘주’로 호칭하고 있음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만유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주의 보좌’는 3절의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과 같은 말이다.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여기서 ‘규’는 원래 벼슬아치들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지니고 다니던 짧은 지팡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규’는 보통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금과 보석등으로 만들어졌다. 한편 여기서 ‘주의 나라’란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가리킨다(2, 10절). 따라서 ‘주의 나라의 규’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을 의미한다.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구약시대 당시의 기름 부음 의식은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성별하여 세울 때 행하던 의식이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별하여 세우고 권능을 더 덧입혀 주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천지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 받으신 왕으로서 세우심을 입었음을 의미한다.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여기서 ‘동류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뜻을 전달하며 계시하는 자라는 측면에서 천사들은 그리스도와 동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사와 달리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지니고 계시며 성육신하셔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 교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셨으므로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것이다.

◆요약/적용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저자는 이제 구체적으로 천사들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저자가 모든 피조물 중
특히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강조한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천사를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보았기 때문이다(갈3:19).
심지어 천사를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골2:18)에 대하여,
천사보다 그리스도께서 월등히 우월한 분이심을 논증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을 견고히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서(5절),
그리스도에 비교될 만한 다른 존재들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엡1:21-22).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히1:4)“ 아멘!
 [2019/10/31   

대표선교사
 ::   천사는 구원받은 자들의 섬김이!
(히1:9-10)
◆본문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해석과 설명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10절)
<10-12절은 시102:25-27의 인용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인용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천지 만물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다. 본래 시102:25-27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이스라엘 회복을 갈망하면서 여호와의 영원하심과 그분의 통치하시는 나라도 영존하는 것임을 찬미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같은 찬미를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 이는 유대교도들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삼위 하나님 중 한분으로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또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지으신 바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들어 세상에 대한 그분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 참여에 대흔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요1:1-2과 유사하다.
‘주의 손으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나 여기서 ‘손으로’라고 표현한 것은 히브리인들의 ‘손’을 권능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손’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을 상징적을 표현한 것이다.(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11절)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유한성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대조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인류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처한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하여 없어지고 그리스도 재림과 대 심판이 있을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란 사실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벧후3:10-13, 계2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존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듯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통치하실 것이다.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12절)
피조물들의 가변성과 그리스도의 영원 불변성을 대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성경은 불변성이란 신적 속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본성은 영원한 반면, 현재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피조물들은 장차 새롭게 변화되어 처음 창조되던 때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롬8:21). 피조물의 이 같은 회복의 역사를 재창조라 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13절)
이는 시110:1의 인용 구절이다. 여기서 발등상은 왕이나 고관들이 좌석 앞에 두어 발을 올려놓은 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대에는 승리자가 패배자의 목이나 머리에 발을 얹어 놓음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시110:1과 본문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 죽음을 당하셨으나 부활, 승천하심으로 사단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정복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사단의 세력을 멸하사 지옥 불 못에 던지시고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해 들임으로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실 것을 가리킨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4절)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보내심이 아니냐’
결론적으로 천사들의 직무에 관해서 정의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다. 즉 저자는 첫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자이신 그리스도와 달리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일 뿐임을 강조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정하신 자들을 구속 구원하시는 분이시나, 천사들은 구원 얻을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일 뿐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와 구원을 얻는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이러한 천사들을 구원의 주체자이신 그리스도와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2절에 나오는 ‘만유의 상속자’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위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반면, 본문의 ‘구원 받을 상속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상속 받을 ‘성도’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칭했다.

◆요약/적용
◦천사는 구원받은 자들의 섬김이 일 뿐이다.
히1:14은 천사들의 직무에 관해서 정의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다.
첫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자이신 그리스도와 달리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일 뿐임을 강조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정하신 자들을 구속 구원하시는 분이시나,
천사들은 구원 얻을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일 뿐이다.
따라서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천사들을
구원의 주체자이신 그리스도와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여기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상속 받을 ‘성도’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상속자)이 되었고
천사는 구원받은 우리의 섬김이 일뿐이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아멘!
 [2019/11/01   

대표선교사
 ::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종 경고①!
(히2:1-4)
◆본문
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해석과 설명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1절)
‘그러므로’
이는 1장 4-14절의 내용인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분이시라는 논증을 받는 접속사다. 즉 저자는 그 논증에 입각하여 이제 본장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여기서 ‘들은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1장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 자신이 말씀하시고, 그의 사도들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즉 ‘복음(Gospel)’을 의미한다. 한편, ‘더욱 유념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더욱 많이 주의하여’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우리가 더욱 열심을 내어 복음을 상고하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흘러 떠내려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파라뤼에오’는 ‘부주의하게 지나치다’, ‘미끄러지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차례 이곳에만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는 ‘역풍 때문에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흘러 떠내려가는 것’, 즉 ‘조난’을 뜻한다. 루터는 이 단어의 의미를 키가 망가져서, 안전한 항구인 구원의 피신처를 지나쳐 떠내려 갈 위험에 처하여 있는 배의 상태로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영적으로 표류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저자 역시 본서 수신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간과해 버리거나,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이에 대하여 주의를 촉구한 것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본서 수신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유대교도들의 비난과 박해 에 흔들려 복음을 저버리고 다시금 유대교에로 되돌아가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천사보다, 모세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거듭하여 강조함으로서, 저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쓴 것이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절)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학자들은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구약의 율법’을 지칭한다고 본다. 그러면 왜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구약의 율법 역식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여 진다. 한편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에 천사들의 중보를 통하여 수여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저자는 율법을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여기서 ‘모든 범죄 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은 율법을 거스려 행동하여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공정한 보응’이란 율법을 거스려 준행하지 않은데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을 가리킨다. 사실 구약 율법은 그 계명을 지켜 행하는데 따른 축복과 계명을 거스려 행악하는데 따른 저주를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여기서 ‘큰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복음 계시의 전단계인 구약 율법과 달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한 구원의 진리인 복음(히1:2)을 가리킨다. 그리고 ‘등한히 여기다’는 말은 무관심하여 자신과 상관없는 것인 양 내버려 두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어찌 피하리요’라는 말은 결단코 피할 수 없다는 당위성을 시사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 절은 과거에 천사를 통해 주어진 구약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한 복음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그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믿지 아니하고 거부하던 유대교도들과 모든 불신자들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진리는 말씀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마다 구원을 덛 얻게 되었다(롬4:16). 이와 관련하여 본 절은 우리가 복음의 권위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 중에 친히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듣고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바로 깨달은 사도들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임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4절)
이것은 복음의 권위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다. 여기서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함께 역사하사 복음의 신적 권위를 뒷받침해주신 것을 가리킨다. 본 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협력적 증거가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났었음을 밝힌다.
첫 번째 양태는 ‘표적들과 기사들’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초자연적 역사를 뜻하지만 굳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표적(헬,세메이온)’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초자연적 역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단어다. 즉 ‘표적’은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해 주는 ‘표징’으로서 ‘초자연적 역사’의 의의를 강조하는 단어다. 그리고 ‘기사(헬,테라스)’는 눈에 보이는 경이로운 사건 자체를 강조하는 단어다. 한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행해진 여러 표적과 기사들이 복음의 신적 권위를 뒷받침해 줌으로서,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 해주고 촉진해 주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과 그 제자들이 행한 이적들의 결과에 의해 분명히 드러났다.
두 번째 양태는 ‘여러 가지 능력’이다.
여기서 ‘능력(헬,뒤나미스)’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말한다. 이것은 표적과 기사들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써 놀라운 일을 행해 보이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살아 역사하심을 계시하시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도록 역사하신다.
세 번째 양태는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일시적으로 성령이 주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성령이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졌다. 이 성령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사 복음의 진리를 믿게 해주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 받은 자들임을 자각하게 해주신다. 본 절에서 저자는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이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선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행5:32).

◆요약/적용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1절)“
여기서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즉 ‘복음(Gospel)’을 의미한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배가 ‘역풍 때문에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흘러 떠내려가는 ‘조난’을 뜻한다.
즉, 배의 키가 망가져 구원의 항구를 지나쳐 떠내려 갈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영적으로 표류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본서 수신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간과해 버리거나,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이에 대하여 주의를 촉구한 것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본서 수신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유대교도들의 비난과 박해 에 흔들려
복음을 저버리고 다시금 유대교에로 되돌아가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천사보다,
모세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거듭하여 강조함으로서,
저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
 [2019/11/02   

대표선교사
 ::   그리스도의 한시적 비하(卑下)!
(히2:5-10)
◆본문
5.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해석과 설명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5절)
‘장차 올 세상’
이는 ‘현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인 장차 세상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초림(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갖는 특징들이 구약 시대에 비해 보다 뚜렷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하나님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미 초림 때에, 자신이 친히 성취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해 신자와 불신자들을 최후 심판하심으로 불신자들은 지옥 불못에 던지시고, 신자들은 천국으로 인도해 들임으로 완성된다(계20-21장). 따라서 이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이다. 결코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히1:14)에 의해 통치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6절)
저자는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6-8절에서 시8:4-6을 인용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이처럼 그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본서의 수신자들인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본문에 인용된 구약 성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8:4의 인용 구절이다.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찬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동일한 의미의 ‘사람’과 ‘인자’란 말을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다. 즉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돌아보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시8:4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것이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7절)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시편 8장의 기자는 영광스런 존재인 천사에 비견하여 인간의 존귀함을 노래했었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신적 영광을 포기하고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인간은 처음 창조될 당시에는 천사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천사에 비해 열등하게 된 것은 타락하여 그 본래의 영광을 상실했기 때부 때문이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본절 또한 시8:5를 인용한 것으로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된 영광스런 존재임을 뜻한다. 그러나 저자는 본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본래의 신적 영광을 회복하신 것(빌2:5-11)을 강조하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8절)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이는 시8:6의 인용이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여금 당신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창1:28). 그러나 저자는 본 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물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시 않고 영광 돌리지 않은 까닭은, 먼저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또한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획책하고 있는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사단과 불신자들을 최종 심판하시기 전까지, 잠시 이 땅의 지배자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시면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 때 만물은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인간이 처음 피조 된 당시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던 만물의 지배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상실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금 그 같은 통치권을 회복하여 완전하게 행사하게 될 것이다(계3:21)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9절)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이는 7절에 언급된 내용이 분명히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자 신적 영광을 버리시고 잠시 동안 천사도보 못한 인간이 되셨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
근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낮아지셨으나 부활, 승천하심으로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빌2:9-11에서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이 온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 죽음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다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공의와 사랑을 법인 구속의 법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고자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온전히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 공로를 힘입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으로 스스로를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서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기꺼이 그와 같이 희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10절)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 곧 창조주이시며 또한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관자이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비단 유대교도들 뿐 아니라 초대교회 교인들 간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일이다(롬11:36, 골1:16). 즉 초대교회 교인들도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을 가리켜 이처럼 호칭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목적이 있었음을 강조한 것으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것이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여기서 ‘많은 아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구원하시고자 택정하신 영적 자녀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성도들을 장차 그리스도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에 인도해 들여 영생을 누리게 하시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죄를 속하여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하는 구속 사역이 요구되었는데,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구속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게 된 성도들은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서 해방 될 수 있게 된 것이다(롬8:1-1).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
즉 예수는 대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인간 구원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놓은 구원의 창시자인 것이다. 다음으로 ‘온전하게 하다(헬,텔레이오오)’는 문자적으로 ‘어떤 목적지나 목표에 이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감내하게 하심으로 대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한님의 뜻에 복종한 온전한 산 제물이 되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 자들이며 장차 영생을 누릴 자들인 우리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고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구원을 최종적으로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이나 시련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신앙의 인내를 해야 한다.
 [2019/11/04   

대표선교사
 ::   주께서 사람들과 형제가 되심!
(히2:11-18)
◆본문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해석과 설명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켰다(출31:13, 레20:8), 겔20:12). 그러나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로서’ 인간의 죄를 속하사 거룩하게 하셨다(히13:12). 여기서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그 대상을 가리켜 법적으로 거룩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성도들을 가리킨다(롬5:8-9). 따라서 성도들은 그처럼 구별된 자로서 마땅히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한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동일하게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들과 영적으로 형제관계에 있다. 예수께서도 친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고 말씀하셨다. 저자는 히1:6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맏아들’이라고 칭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맏형이 되신 것이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12절)
본 절은 시22:22의 인용으로 저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적용하고 있다. 본래 시22:22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사울에게서 온갖 핍박과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전형적 인물로 시22편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수난과 영광의 회복에 대하여 예언한 메시야 예언시다. 따라서 저자가 본 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이미 이러한 이해가 먼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본 절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교회(헬,에클레시아)’는 ‘에크(from)’ + ‘칼레오(call out)’의 합성어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세상에서 구별되어진 사람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3절)
본 절에는 두 개의 구약 인용 성구가 있는데 실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다. 사8:17-18의 인용 성구인 본 절은 본래 선지자 이사야가 앗수르의 침략에 직면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 말로서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선언의 말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 적요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요지를 달리하고 있다. 즉 첫 번째 인용구인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는 예수 자신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는 것과 같은 고난을 감내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인용 성구인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한 형제 됨을 다시한번 강조한 것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
여기서 ‘혈육’은 하나님께로부터 육신과 그 생명 되는 피를 부여 받아 피조 된 인간을 가리킨다(마16:17, 엡6:12). 그런데 예수께선ㄴ 이러한 인간의 참된 형제가 되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과 동일한 인성을 위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외견상으로만 인간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가 없으신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하나님의 지으신 이간과 동일하게 되셨던 것이다(히4:15).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마귀 곧 사단의 유혹으로 범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망이 아담과 그 후손에게 이르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인간들을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공의와 사랑의 법’인 구속 근원의 법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죽음을 당하심으로, 인간을 미혹하여 범죄 하게 하고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한 사단의 사망 권세를 결정적으로 격파하신 것이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5절)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이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늘 그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한 언급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아담이 범죄 한 이래 사망의 운명에 놓인 모든 인간이 지니는 자연적인 두려움이다(욥3:25).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고 의지함으로 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비록 모든 인간들에게 필연적으로 닥치는 육신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시에 부활할 것과 이후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음으로(고전15:12-24),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6절)
여기서 ‘붙들어 주다’는 말은 ‘돕다’, ‘구원해 주다’는 의미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들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 그의 영적 자손들, 즉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 일컬음 받게 된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 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이 천사들을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실 천사들은 혈과 육에 속하지 않은 영적 존재이므로 죽음에 예속되어 있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신 것은, 죄인인 인간들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지 천사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절)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마땅하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페일로’는 ‘...할 의무를 지니다’,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인간 구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
그리스도를 가리켜 ‘대제사장’이라 칭함은 신약 성경 중 본서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호칭은 구약 시대 당시의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구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보역할을 수행하여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듯이,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친히 자신의 몸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영원한 중보자 역할을 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한 칭호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를 가리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라 칭한 까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류에 대하여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행하셨다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충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절)
여기서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test)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temptation)을 가리킨다. 인간이 지닌 연약성 중에 하나가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가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데 성육신 하신 예수도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사단의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같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다(히4:15). 즉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 후에 사단으로부터 유혹 받으셨고(마4:1-1),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두고도 인간적 갈들과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마26:36-4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친히 육신의 시험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인간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으시고, 시험에 승리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인간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신 것이다.

◆묵상/적용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절) 아멘!

여기서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test)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temptation)을 가리킨다.
인간이 지닌 연약성 중에 하나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기 쉽다는 점이다.
성육신 하신 예수도 이러한 사단의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같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다(히4:15).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유혹 받으셨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두고도 인간적 갈들과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친히 육신의 시험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인간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으시고,
시험에 승리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인간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오늘도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하루되기를 기도한다.
 [2019/11/05   

대표선교사
 ::   모세보다 우월(기능)하신 그리스도!
(히3:1-6)
◆본문
1.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해석과 설명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그러므로’
이 접속사는 앞장과 연결된 것으로 앞장에서 저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셨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어 본장에서는 그처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그들의 조상 중한사람인 모세와 비교해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여기서 ‘함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코이’는 본서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본래 ‘나누는 자’, ‘친구’, ‘동반자’라는 의미의 말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같이 동참한자들인 믿음의 형제들, 즉 성도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늘의 부르심을 입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성도로 부름 받은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을 달리 호칭한 것으로 그분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히6:4, 4:8, 5:9, 23:11, 12:22등). 즉 본 구절은 성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는 믿음의 형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직역하면 ‘일치된 의견’이라는 뜻이다. 이는 좁은 의미에서 교회가 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믿는 복음의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음으로 ‘사도(헬,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파송하신 자’라는 의미에서 ‘사도’와 동일한 ‘보내신 자’라고 칭하신 적이 있다(요17:3). 그리고 모세도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언급되었다(출3:1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라는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명으로부터 구원하실 자임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를 가리켜 ‘대제사장’이라 칭한 것은 구약 시대 당시의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구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보역할을 수행하여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친히 자신의 몸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영원한 중보자 역할을 하고 계심을 나타낸 말이다.
‘깊이 생각하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에사테’는 ‘어떤 일에 몰두하다’, ‘마음을 고정시키다’는 의미로, 저자는 이 단어를 명령형으로 사용하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되심과 대제사장 되심에 대하여 단순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념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임을 명령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시는 인도자시오, 영생에 이르도록 중보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
‘자기를 세우신 이’
여기서 ‘세우신(헬,포이네산티)’는 ‘임명했다’, ‘직무를 주셨다’는 의미다. 즉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인간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 그 직무상 하나님에 의해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으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이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저자는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에대하여 설명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충성 및 그 사역과 예수의 충성 및 그 사역을 비교한다. 모세는 구약의 인물 중 가장 충실한 하나님의 일꾼 중 한 사람 이었다(민12:7).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온 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인 성막이나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처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그 분의 택하신 백성들의 집합체(6절 참고)를 가리킨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가리켰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의 집합체인 우주적 교회를 가리킨다(엡2:21-22). 이것으로 볼 때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던 모세는 구약 선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충성했으나,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역이 미치는 범위 상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3절)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더욱 존귀하며 더 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다. 여기서 집이란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성도들의 집합체인 우주적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 모세가 그 우주적 교회 공동체의 일부인 구약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이자 그 공동체를 위해 수고한 ‘하나님의 종’이었다면(5절),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교회 공동체를 포함하는 전우주적 교회 공동체를 자신의 피로써 세우신 설립자이시다(마16:18, 행20:28).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종과 그 교회 공동체의 설립자이신 그리스도 간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근 차이가 있다. 한편 이처럼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뛰어나고(히1:4-14),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임을 논증하고 있는 이유는, 유대인 개종자들인 본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약 성경이 장차 오실 자로 예언한 메시야이심을 깨달아 알고 바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절)
지금까지 1-3절에서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해 온 저자는 본 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원문에는 헬라어 ‘가르(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사실을 가만할 때, 본 절은 하나님의 집의 건설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만물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라는 것이 본 절의 의미인 것이다. 저자는 집마다 집을 지은 자가 있듯이 만물이 배후에는 그것을 만든 이가 계심을 논증한 뒤, 그 만든 이가 삼위 일체 하나님이심을 밝힘으로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5절)
본문이 뜻하는 바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구원의 복음에 관한 모세의 증거를 지칭한다는 견해와 이와는 다르게 모세 자신이 말한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두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 두 견해 모두 모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자로서의 사역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 되는 자로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 한 자라는 것이 두 견해 모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 나오는 ‘종(헬,테라폰)’은 주인을 섬기면서 주인의 집을 맡아 관리하는 일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
저자는 주님의 공적 사역과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 1절에서 사용한 ‘예수’ 대신 ‘그리스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들(헬,휘오스)’은 5절의 ‘종’과 대조되는 말이다. 한편, 가부장 시대의 가계 계승에 있어서 ‘아들’은 그 그 가계의 기업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사환은 모든 권한을 가진 가부장이 시키는 일만 할 뿐 아무런 상속권을 지니지 못한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뒤에 나오는 ‘우리가 그의 집이라’에 종속되어 있는 이 구절은 집, 곧 우주적 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에 관하여 시사해 준다. 그것은 곧 우리 모든 성도가 담대하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적 자녀 된 신분을 자랑하고 기뻐하면서 어떠한 형편 가운데에서도 굳세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이롭다 칭함 받으며, 장차 그리스도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에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우리는 그의 집이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 문구가 본 절 맨 앞에 강조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곧 이 구절이 본 절에서 핵심 되는 주 문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로서 우리(모든 성도들의 집합체인 우주적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집(고전3:16)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충성스런 종 모세는 그 집의 종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로서 그리스도와 모세 중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완전히 명백해졌다.

◆묵상/적용
아들과 종!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시다.
저자는 주님의 공적 사역과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
1절에서 사용한 ‘예수’ 대신 ‘그리스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들(헬,휘오스)’은 ‘종’과 대조되는 말이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란
우주적 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에 관하여 교훈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담대하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영적 자녀 된 신분을 자랑하고 기뻐하면서
어떠한 형편 가운데에서도 굳세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이롭다 칭함 받으며,
장차 그리스도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에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한편, ‘우리는 그의 집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고전3:16)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주인이시고,
모세는 그 집의 종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우월하시다.
 [2019/11/07   

대표선교사
 ::   모세보다 우월(지도력)하신 그리스도!
(히3:7-14)

◆묵상과 적용
초심을 잃지 말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4)“

여기서 ‘시작할 때’란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를,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끝’은 개인의 종말론적으로는 개개인이 육신적 죽음을 당하는 때를,
세상 종말론적으로는 현세상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다음 ‘견고히 잡는다’는 것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을 굳세게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굳게 견지하여’
주님의 날까지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며 살아야 한다.
믿는 자들 중에는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초심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져서 첫 믿음을 잃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내가 그런 것 같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아멘!
 [2019/11/08   

대표선교사
 ::   불신앙에 대한 재 경고②!
(히3:15-19)
◆본문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해석과 설명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15절)
여기서 ‘성경에 일렀으되’는 구약 성경을 인용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인용된 구절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본 절은 시95:7-8절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미 앞서(7-8절)인용했던 내용이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16절)
16-18절은 자문자답형식으로 구성된 글이다. 그 중 본 절에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 17절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대상이, 18절에는 그 진노의 결과가 언급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누구냐?’는 불명확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대상을 지칭하는 의문사다. 즉 이 의문사는 그 답을 알면서 하는 반어적 의문사다. 과거 모세 당시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의 역사를 체험하였으면서도 작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 심지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함으로서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었다(민14:8,11). 본문은 인간은 이렇게 가장 좋은 것을 받고도 계속 원망만하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17절)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죄는 반드시 그 죄 값을 받는다. 그리고 그 죄 값은 사망이다(롬6:23). 따라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여 범죄 한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는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이는 곧 오늘 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거부하는 불신자들 역시 세상 심판 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계20:11-15)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18절)
여기서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믿음으로 쟁취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과거에 종노릇 했던 애국 땅으로 되돌아 가려고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곧 저들을 가나안 땅에로 인도해 들이려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이다. 한편, 오늘 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지 않은 것은 이미 심판을 자초한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장차 그리스도 재림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요3:16-17).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9절)
여기서 ‘이로 보건대’는 7절부터 지금까지 저자가 말한 내용을 결론짓는 핵심 내용이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 제사를 드렸던 가인이 그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그랬고,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 민족이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복음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불순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정죄 당할 수밖에 없는 가장 기본적인 죄악이며, 그러한 죄를 범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일 뿐이다. 그 칭의(의롭다 함을 받는 것)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1:17).

◆묵상과 적용
◦불순종의 죄!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믿음으로 쟁취하려 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로 인도해 들이려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한편, 오늘 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지 않은 것은 장차 그리스도 재림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요3:16-17).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가인이 그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그랬고,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 민족이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복음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불순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정죄 당할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며,
그러한 죄를 범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1:17).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히3:18)“ 아멘!
 [2019/11/11   

대표선교사
 ::   순종함으로 얻게 될 안식!
불신앙의 위험성!
(히4:1-13)
◆본문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해석과 설명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여기서 ‘그러므로’는 3장 마지막 절의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를 받는다. 즉 이는 누구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두려워하라는 의미다.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말은 영적으로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견지하라는 의미다.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함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예표에 불과하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하고 참된 안식처인 영적 가나안 땅,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약속(막1:15, 눅6:20)은 아직 유효하다. 한편 본서에 ‘약속(헬,에팡겔리아)’이라는 단어가 14회나 반복적으로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용어로서, 본래는 ‘공고’, ‘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공적으로 선언(선포) 된 말은 하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 것이다.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기서 ‘미치지 못하다(헬,휘스테레오)’는 ‘너무 늦어지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다’, ‘양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이 낱말은 시작은 했는데 끝을 맺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본 절은 ‘실제로 안식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는 말이다. 즉 과거에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제1세대가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전례가 있으니, 이와 동일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삼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본서의 요지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경고의 말씀이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여기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신 ‘복된 소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희’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며, ‘우리’는 신약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들을 지칭한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이란 축복된 약속(출3:7-8)을 받았다.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하늘의 가나안인 천국에서 참된 안식이란 축복된 약속을 받았다. 따라서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받은 자들이다.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그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 역시 그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이 그에게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복된 말씀은 인간이 그 말씀에 대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는 복음을 주셨다. 그러나 그 복음에 대해 그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인도해 들일 생명의 복음에 우리가 믿음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그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며, 우리는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게 하는 인간의 최소한의 책임이며 의무다. 그런데도 당시 유대교도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과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고 거부했다. 그리고 유대인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본서 수신자들을 미혹해서 다시금 유대교에 돌이키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본서 기자는 저들에게 미혹당하지 않고 진리에 확고히 서도록 하기 위해 이 신앙 변증서를 썼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미 믿는 우리들’이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며, ‘저 안식’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 곧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들어가는 도다(헬,에이세르코메다)’는 이미 동작이나 상태가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 동사다. 이 말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바 된 자들이며, 또한 장차 그 나라에 분명히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다. 즉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장차 들어가 영원토록 거하게 될 처소인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다. 저자는 이 확실하고도 최종적 성취를 향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이는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저들을 가나안에 인도해 들이고자 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출애굽 제1세대들에 대한 하나의 진노의 말씀인 시95:11의 인용이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본 절을 정리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패역하고 마음이 완고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사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맹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결코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쉬심으로 안식은 성취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아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4절)
4-10절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안식에 대하여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본 절은 저자가 안식에 관한 근거를 성경을 통해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저자는 먼저 하나님의 안식이 상징적으로 이미 성취되어 그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천지 창조후의 안식 기사에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제 육일까지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뒤 칠일 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다(창2:2-3). 따라서 천지 창조 이래 안식은 계속해서 존속하고 있는데, 이는 장차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거할 자들에게 주실 영원하고도 진정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즉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하지 않은 지금은 누구든 믿음으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5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 ㄴ후 제 7일째 안식하신 데 대한 기사가 보여주는 안식의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고를 받은 사실을 시95: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에 의거해 또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같은 선고를 받는 이유를 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6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탓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그 약속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
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을 받았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를 지칭한다.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 구절은 안식의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선언을 받았던 이유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원인은 단 한가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었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7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윗(BC1040-970년)은 모세(BC1527-1406년)로부터 약 600년 후의 사람이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글’은 구약 성경의 영ㄱ본 중 하나인 70인역에 그 저자가 다윗으로 명기되어 있는 시95편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윗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이는 이미 히3:7-8에서 인용된 시95:7-8 말씀이다.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말씀을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주의말씀, 즉 복음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다시 교훈하고 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었다(신3:20). 여호수아는 이러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보내진 정탐꾼들 중 갈렙과 함께 유일하게 가나안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자(민14:6-10)였다. 그는 모세가 죽은 후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비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가나안을 정복한 뒤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리라고 한 약속은 성취된 셈이다(수21:44).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다윗의 글에 근거하여 그 기업이 참된 안식을 위한 기업이 아님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데도 그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다시 안식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7절). 이처럼 이미 안식에 들어 갔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안식을 주시겟다는 것은 현재의 안식이 참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가나안 땅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폐하여지고 말 이 세상에 존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안식의 기업으로 받은 땅은 장차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성도들이 기업을 받을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절)
이것이 이제까지 구약 말씀을 인용해가며 설명해 온 저자의 논점이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제 1세대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눈앞에 바라다 보이는 가나안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반해 그 후손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안식의 기업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하고 참된 안식은 아니다. 따라서 참된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안식의 때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날의 성도는 출애굽 제1세대처럼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참된 안식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10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견해들이 있지만, 이미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감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확실하게 보장 받고 있는 성도들을 지칭한다는 것이 합당하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것은 창2:2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6일 동안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 그런 하나님의 쉬심은 장차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수고와 질고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저 안식’은 앞(3절)에서 언급한 ‘안식’ 곧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힘쓸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푸다소멘’은 ‘촉진시키다’, ‘열심으로 노력하다’는 의미다. 비록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인간 편에서는 그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써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이란 하나님께 불순종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의 죄악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본 절은 성도들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오늘날의 성도들은 불순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위함이다(히3:13).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순종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려는 사단의 계교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다. 사단은 옛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한 것 같이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벧전5:8) 성도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려 획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사단에게 미혹당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12절)
☀저자는 4:1-11에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 언급하다가 12-13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구든 장차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인격을 변화시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헬, 호 로고스 투 데우)’이 ‘레흐마’가 아닌 요1:1에 나오는 로고스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말씀’ 즉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살았고’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의인화 한 것이다. 말이란 그 말을 하는 자의 인격과 권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당신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만드신 천지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로서 인간의 심령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살아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활력이 있다(헬,에네르게스)’는 ‘정력적인’, ‘힘찬’이라는 뜻의 낱말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활동역력을 뜻한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움직이는 운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역동성을 지닌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심령에 역사하여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죄악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신 심판을 면하지 못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장차 이 세상도 하나님의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 여부에 따라 정확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서 ‘좌우에 날선 검처럼 예리하다’는 말은 이 같은 엄정성과 정확성을 의미한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
본 절은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과 함께 인간을 영과 혼과 육체로 삼분하는 ‘삼분설’의 근거가 된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절의 ‘관절과 골수’를 육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혼’과 ‘영’을 각각 독립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삼분설주의자들은 혼을 육적 생명의 원동력 또는 중심으로 보며 영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이성으로 본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자칫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이원적으로 구분시킬 위험이 있다. 즉 영만이 하나님과 교제한다면 육체는 들러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과 육이 합일된 전인격체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분설’이 설득력이 있다. 이 이분설에 따르면 혼(soul)과 영(spirit)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말로 이해하고 있다. 한편, ‘관절’은 인간의 몸을 지탱해주는 뼈와 뼈를 서로 연결해 주는 부위이다. 그리고 ‘골수’는 뼈의 내강에 차 있는 연한 조직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육체 중 가장 단단한 것 그리고 가장 내부의 깊숙한 것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여기서 ‘찌르다(헬,디이크네오마이)’는 ‘꿰뚫다’, ‘관통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쪼개다(헬,메리조)’는 ‘분할하다’, ‘조각조각 나누다’는 뜻이다. 이처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어떠한 신체 부위도 관통하고 쪼개기까지 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육을 완전히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그리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 역사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여기서 ‘마음의 생각과 뜻’은 인간의 지-정-의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내밀한 지식과 생각과 감정마저도 다 아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판단하시는 분이시다. 이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속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할 한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절)
여기서 ‘지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 이제 본서 저자는 인간의 심령까지도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만물을 통찰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옮기고 있다 즉 천지 만물을 친히 주관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 한편,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는 만물이 하님의 통찰력 앞에서 그 실체를 완전히 드러낼 뿐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즉 인간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천지 만물의 속성과 그 처해 있는 상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통찰하고 계시다. 또한 ‘드러나느니라(헬,트라켈리조)’는 본래 ‘목을 뒤로 젖히다’는 의미의 낱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본 절이 뜻하는 의미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①레슬링 선수가 상대의 목을 졸라 그를 바닥에 누임으로 이기는 것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쓰러져 항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알포트, 모페트등)
②제물의 가죽을 벗겨 그 속을 드러내듯이 만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기듯 그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크리스톰, 빈센트등)
③죄수를 처형할 때 그의 목을 치켜 올려 수치스러운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듯이 만물이 하님 앞에 그 실상을 완전히 드러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블릭, 드 와트등)
이 중 많은 학자들은 이 세 견해 중 ②③이 전후 문맥에 비추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본 절의 분명한 의미는 하나님의 통찰력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만물 가운데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요약/적용
◦믿음으로 반응하는 제자!
(히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이란 축복된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성도인 우리도
천국에서 참된 안식이란 축복된 약속을 받았다.
따라서 신구약 백성 모두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그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은 출애굽 제1세대에게 가나안이라는 복음을 주셨다.
그러나 그 복음에 대해 그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생명의 복음에 우리가 믿음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그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복음이 복음 되려면 믿음과 순종으로 화답해야 한다.
우리도 오늘의 광야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제자가 되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아멘!

◦말씀의 능력!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또 하나는 ‘레마’로 성도 각자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본절은 ‘로고스’로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말씀’ 즉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살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의인화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심령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살아 있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말은
인간의 죄악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엄정성과 정확성을 의미한다.
한편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라는 말에서
‘관절’은 인간의 몸을 지탱해주는 뼈와 뼈를 서로 연결해 주는 부위이며,
‘골수’는 뼈의 내강에 차 있는 연한 조직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육체 중 가장 단단한 것과 가장 깊숙한 것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육을 완전히 주장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전 존재와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 능하신 말씀에 사로 잡혀 사는 제자로 살자.
 [2019/11/13   

대표선교사
 ::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실 큰 대제사장 예수!
(히4:14-16)
◆본문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해석과 설명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절)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자시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이미 1:3과 2;17, 그리고 3:1에서 언급했다. 이제 14-16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구약 시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직 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의 우월성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 당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의 대 속죄일에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렸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도 불완전한 죄인인지라 매년 동일한 속죄 제사를 반복해 드려야 했다. 즉 인간 대제사장은 대속 사역을 단 한 번에 완결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친히 희생 제물로 삼아 단 한번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단번에 완전히 대속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9: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위대하고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의미에서 ‘큰 대제사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저자가 구약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사장직을 수행한 이론 계통의 대제사장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이유는, 유대교도들이 부인한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이시며, 이 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믿는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믿는 구약의 정통 신앙을 계승한 종교임을 변증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로써 당시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개종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배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여기서 ‘승천하신 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신 후 부활, 승천하셨음과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지금도 성도들을 위해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 사역을 수행하고 계심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롬8:34, 히7:25).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참 인간이 되셨던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의 참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중요한 표현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인 양성을 지녔던 분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이셨음을 시사해 준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고 언급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여기서 ‘믿는 도리’란 하님의 계시된 말씀에 기초하여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구원에 관한 기본 진리를 말한다. 그리고 ‘굳게 잡으라(헬,크라토멘)’은 ‘힘을 다해 집요하게 달라붙으라’는 뜻이다. 성도는 구원에 관한 진리를 최고 귀한 것으로 여겨 온 힘을 다해 그 진리에 착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믿는 구원의 진리가 참된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진리를 믿는 자로서 모든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우리에 영생을 제공해 주는 하나님의 변개하지 않는 약속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이란 도덕적, 육체적으로 연약하여 죄에 미혹당하기 쉬운 인간의 한계,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정하다(쉼파데오)’는 ‘함께 고난을 당하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적으로나 관념적으로만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인간이 되셔서 온갖 연약한 점을 다 체험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
여기서 ‘시험(temptation)’은 인간의 연단을 받는 것을 뜻하는 테스트가 아닌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모든’과 ‘똑같이’이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기기 쉬운 시험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다른 인간과 ‘똑같이’ 받으셨고 이기셨다. 만일 그가 모든 시험을 겪고 이기지 못하셨다면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과 시험을 다 감당하셨으며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기셨다.
‘죄는 없으시니라’
이 말은 애초에 예수님은 죄 성을 가지고 태어나시지도 않았고, 또 시험에 굴복하여 범죄하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만일 범죄 한 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는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므로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대속의 직무를 감당하려면 그 사람은 죄가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론의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하시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무죄한 가운데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절)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여기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은 ‘적당한 시기에’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백성에게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은혜를 베푸신다. 물론 여기서 ‘적절한 때’란 인간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 후 즉각적인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보좌 앞’
이것은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곁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히8:1).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과 위엄의 보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사역에 의거하여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힘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엄과 심판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되었음으로 그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간다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는다 말과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으로, 심판이 영생으로, 정죄가 긍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

◆요약/적용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은 ‘적당한 시기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백성에게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은혜를 베푸신다.
물론 여기서 ‘적절한 때’란 인간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를 가리킨다.
한편, ‘은혜의 보좌 앞’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과 위엄의 보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므로,
이제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된 것이다.
그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간다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으로,
심판이 영생으로, 정죄가 긍휼로 변화한다.
바로 우리가, 내가 그 은혜를 입은 증인이다.
오늘도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자!
 [2019/11/14   

대표선교사
 ::   대제사장의 자격!
(히5:1-10)
◆본문
1.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해석과 설명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여기서 ‘...마다’라는 말은 예외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저자는 본 절에서 구약시대에 아론을 뒤이어 대제사장이 된 모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사람 가운데서’ 선택된 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라는 말에서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하나는 대제사장은 반드시 인간 중에서 선택되어져야 했다는 자격 요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의 대제사장은 그 자신도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사를 드리던 대제사장은 반드시 인간 중에서 선택되었으며(2절), 또한 이제까지의 대제사장은 아담의 타락 이래 죄책을 전가 받아 원죄를 입고 태어난 동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속하는 온전한 대속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음을 뜻한다(3절). 그러나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면서도 인간의 죄를 대혹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자신의 몸으로 속죄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9:11-28).
‘하나님께 속한 일’
이는 단적으로 설명하면 ‘속죄의 일’을 말한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런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도록 세운 이가 제사장들이며 그 제사장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대표하는 자가 곧 대제사장인 것이다. 이 대제사장의 주요 직무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종교력으로 매년 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 사역을 행한 것이다(레16:23-28). 이 속죄일의 속죄 제사는 제사장들이 드릴 수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성취하신 대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었다(히9:11-15).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여기서 ‘위하여(헬,휘페르)’라는 말은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일하던 중보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속죄일에 자신을 포함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을 말하며, ‘속죄하는 제사’는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을 가리킨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2절)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의 결핍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혹된 자’라는 것은 고의적으로 뻔뻔하게 범죄 한 것이 아닌 앞의 무지로 말미암아 범죄하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무지한 자’와 ‘미혹된 자’는 거의 동의어다. 또 ‘용납하다’는 말은 헬라오 ‘메트리오파데오’로 ‘온화한’이라는 의미의 ‘메트리오스’와 ‘느끼다’는 뜻을 가진 ‘파데오’의 합성어로 ‘동정심을 갖다’라는 의미다.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여기서 ‘연약’이란 단순히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죄성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또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히4:15). 즉 아론의 뒤를 이은 모든 대제사장 역시 아담의 범죄 이래 원죄를 입고 태어난 인간들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절)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 대속죄일에 자신은 물론 온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킨다(레16장).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그것이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의무임을 암시한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부패한 성향을 지닌 존재로서 대제사장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처럼,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레16:6-17). 한편 이러한 사실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 드린 속죄 제사가 결코 인간의 죄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절)
여시서 ‘이 존귀’란 대제사장의 직분의 존귀함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직분이 존귀했다(1절). 더욱이 이러한 대제사장직은 인간이 스스로 자원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운이래 아론 자손만이 세습할 수 있었다(출28:1, 출29:1-9). 그런데 이처럼 대제사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성도들을 위한 ‘큰 대제사장’(히4:14)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5-6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5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여기서 ‘이와 같이’란 대제사장이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자인 것 같이란 말이다(4절). 이제까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대제사장이시며 온전한 대제사장이신가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즉 앞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제사장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이어야 하며(1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4절). 본 절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조건에 대한 언급이다. 즉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인류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인류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이다(빌2:6-7). 따라서 인류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두 번째 조건에 부합한 자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말씀하신 이’는 그리스도를 인류의 중보자로 택하여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지칭하며 ‘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인류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구절은 시2:7의 인용구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왕인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노래한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영원하신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달리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다. 즉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그 근본 상 차이가 있음을 들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자장직의 우월성을 이렇게 논증한 이유는 유대교도들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믿는 기독교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는 구약의 정통 신앙을 계승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6절)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
시110:4의 인용이다. 이는 메시야 예언시로서 단순히 제사장직만이 아니라 왕의 지위까지 겸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용하여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
‘멜기세덱의 반차’
‘의(義)의 왕’이란 뜻. 살렘(예루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14:18-20). 부모도, 족보도, 출생일도 알 수 없고, 생명도 끝이 없어 신적 존재를 방불케 하는 자다(히 7:3). 가나안 북방 연합군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환대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십일조)을 바쳤다. 시편 기자는 이 멜기세덱을 다윗 계통의 한 왕으로 영원한 제사장이라 칭하고 있고(시 110:4),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하는 자라고 했다(히 5:6-10; 6:20; 7장).->멜기세덱: 10절 참고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여기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란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 지내셨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1절)을 충족한 사실을 언급하는 구절이며,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성부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는 성부께서 보내시는 대로 인류를 위한 희생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대속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시 승천하셨다. 근본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 인해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가 없으셨으며, 만약 하나님께서 하려고만 하셨다면 독생자 예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래 타락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갚는 대신,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자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으셨으며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대속 죽음을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성부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킨다(마26장, 막14장, 눅22장). 물론 주님은 이전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우신 적이 있다(눅19:41, 요11:35). 그러나 전 인류의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야 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인간적 고통과 번민을 안고 성부 하나님께 울며 간구하셨다.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여기서 ‘그의 경건하심을 인하여’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자 한 것을 의미한다. 또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는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한 예수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인간의 죄를 속하기 이한 대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8절)
여기서 ‘배웠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도록 ‘훈련하였다’ 또는 ‘습득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몸소 ‘체험하였다’는 의미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위하여 전혀 고난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지만(빌2:6), 성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구약의 거듭된 약속과 예언에 따라, 자기의 신적 영광을 버리시고 성육신하셔서 고난 중에도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눅2:48, 요8:29, 빌2:7).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9절)
‘온전하게 되셨은즉’
본 절은 8절과 연결해서 볼 때 고난은 순종을, 순종은 온전함을 낳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간 구원으로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로써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인정 받으셨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마16:24).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기서 ‘영원한 구원’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성도들에게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의미한다. 한편, ‘근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오스’는 ‘원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구원 얻는 자의 씨앗이요, 원인이며, 첫 열매가 되신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에 믿음으로 참예함으로 그를 따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롬6:4-5).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절)
☀참고-멜기세덱(Melchizedek)(6절 주석 참조)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아브라함은 북부 가나안 동맹군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리품을 획득한 뒤 승전을 축하하러 온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감사 예물로 주었다(창 14:18-20). 멜기세덱은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한다. 그래서 그가 누구냐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셈이나 에녹, 욥과 같이 아브라함의 경건한 신앙 선조라는 견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 혹은 천사나 성령이라는 견해다. 셋째, 이방인 가운데 여호와 신앙을 가진 가나안 왕이라는 견해다. 대개는 세 번째 견해를 취한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출생이나 부모, 족보, 죽음, 나이 등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말하자면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방불케 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멜기세덱의 특성을 일컬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 말한다(히 7:3).
◦다윗과 멜기세덱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가문을 통해 한 왕이 나타날 것인데,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주’라고 고백하였다(시 110:1). 말하자면 다윗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메시야 예수가 오실 것을 시(詩) 형식으로 예언하고 있다. 훗날 예수께서도 다윗의 이런 신앙 고백을 근거로 들어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다(막 12:35-37). 다윗은 이미 구약 시대에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인물임을 신령한 지식으로 예언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
히브리서 기자는 무려 3장에 걸쳐(히 5:6-11; 6:20-7:28) 인간 대제사장의 불완전성으로는 결코 영원한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구약에 언급된 멜기세덱의 특징을 묘사하고 멜기세덱이야말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확신하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묘사한 멜기세덱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왕과 제사장이란 이중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②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바 그는 ‘의(체덱)의 왕(멜렉)’이며, 또 ‘살렘’(‘평강’이란 뜻)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③ 출신, 부모, 족보, 나이를 알 수 없어 갑자기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신비한 인물이다. ④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신분이다. ⑤ 다윗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 계열의 또 다른 제사장을 언급하고 있다(시 110:4). 이런 멜기세덱의 특징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요약/적용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아멘!

앞에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대제사장이시며
온전한 대제사장이신가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인류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인류의 중보자가 되셨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달리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자장직의 우월성을 이렇게 논증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믿는 기독교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는 구약의 정통 신앙을 계승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당시 그리스도를 믿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019/11/15   

대표선교사
 ::   영적 미성숙함에 대한 책망!
(히5:11-14)
◆본문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해석과 설명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본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유사성에 대해 아주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자 원했으며, 그것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한 듯하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멜기세덱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논의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주제의 중요함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여기서 ‘둔하다(헬,노드로스)’는 히6:12에서 ‘게으름’으로 번역 되었는데 본절에서는 신경이 둔하고 무감각한 것을 뜻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427?-347?)도 그의 저서에서 어리석고 깨달음이 느린 자기 제자를 이 단어로 호칭했다고 한다. 아무튼 저자는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해서 멜기세덱에 관한 지식을 알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12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여기서 ‘때가 오래 되었다’는 말은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는 의미다. 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인 경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성장하여 성인이 되듯이 신자도 거듭난 후 정상적인 영적 성장과정을 거쳤다면 마땅히 신앙 연륜이 찬 후에는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에 관해 가르침을 받는 자가 아닌 지금까지 듣고 깨달아 확신한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독자들은 그렇지 못함을 책망하는 것이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로서 ‘계시된 말씀’ 또는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 모세 오경이나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켰으나 ‘신구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매우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서의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 되었음에도 그들의 영적 게으름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여 남을 가르치기는커녕 자신들이 아직 더 이 같은 기독교 기본 진리에 관해 배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기서 ‘단단한 식물’과 ’젖‘은 인간의 소화능력을 가늠하게 하는 좋은 대조물이다. 단단한 식물은 튼튼한 치아와 건강한 위를 전제하기 때문에 온전한 성인이 먹는 음식을 의미하며, 젖은 어린 아이나 먹은 음식이다(고전3: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는 젖과 같이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의 것이며, 말씀의 심오한 진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것이다. 그런데 본서의 독자들은 전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도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데 그들의 영적 미성숙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먹어야 할 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다. 즉 본서 독자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결과 자신들을 이 처럼 낮은 수준의 신자들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빈센트).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3절)
여기서 ‘의의 말씀’이란 12절으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또는 ‘젖’과는 대조되는 ‘단단한 식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좁게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과한 지식을 의미하며, 넓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전반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한편,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경험’이란 말은 단지 지적인 깨달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면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4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
‘장성한 자(헬,텔레이오)’란 본래 ‘성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지덕체(智德體), 즉 지적, 인격적 영역에서 성숙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성숙하여 구원에 관한 기본 진리들을 깨달아 확신하고 있으며, 확신한 바 대로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우리가 사람의 성숙 정도를 논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성숙이 상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성인은 어린이아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절대적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지각(헬,아이스데테리온)’은 본래 감각 기관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영적 분별력’을 의미한다(로버트슨). 그리고 ‘연단 받다’는 말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분별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전2:10-15). 다음으로 본 절에서 말하는 ‘선악’이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선악,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을 의미한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과 같은 성도는 이를 능히 분별할 수 있으나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는 이를 분별할 수 없다. 우리가 성령에 온전히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엡4:13).

◆요약/적용
◦믿음이 장성한 자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여기서 ‘장성한 자’란 본래 ‘성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지적, 인격적 영역에서 성숙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성숙하여 구원에 관한 기본 진리들을 깨달아
확신하고 있으며 확신한 바 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가 사람의 성숙 정도를 논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성숙이 상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성인은 어린이아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절대적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다.

또 ‘지각’이란 본래 감각 기관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영적 분별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연단 받다’는 말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분별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여기서 말하는 ‘선악’이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선악,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을 의미한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과 같은 성도는 이를 능히 분별할 수 있으나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는 이를 분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엡4:13).
 [2019/11/16   

대표선교사
 ::   신앙 성숙에 대한 권면!
(히6:1-3)
◆본문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해석과 설명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1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여기서 ‘그러므로’는 앞 장 후반(11-14절) 내용의 연속선상에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신앙에 관하여 교훈함을 나타내는 접속사다. 본 절에서 주목할 단어는 ‘너희가’가 아니라 ‘우리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엡4:13)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즉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불환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성도는 누구든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란 말은 히5:12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와 같은 의미로 기독교 기본 진리 중에서도 매우 기초적인 것을 의미하며, ‘버리고’는 헬라어 ‘아피에미’는 ‘그만두다’, ‘남겨두고 떠나다’는 뜻으로, 이 말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본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거기서 출발하여 더 높은 신앙의 경지에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물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죽은 행실’이란 전적으로 모순된 말이다. 왜냐하면 ‘행실’이라는 말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로부터 결괴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물리적인 관점에서 사용된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견지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인간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 물리적인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 된 행동인 경우 그의 결국은 영원한 사망이다(롬6:21,23). 따라서 저자는 그 같은 악한 행동을 가리켜 ‘죽은 행실’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편 ‘회개’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가, 하나님을 등진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이후로는 하나님께 순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자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회개는 죄악 된 생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덕목이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심령에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2절)
‘세례들’
여기서 ‘세례들’이 복수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 이 의미를 ‘물세례’와 ‘성령 세례’ 혹은 ‘유대인의 정결례’와 ‘요한의 세례’ 또는 ‘기독교의 세례’등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의 기록 목적 중 하나가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인들 중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려 한 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부활과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교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의 믿음과 영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15:16-19). 그리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리스도 재림시에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요3:18; 계20:15). 만일 이러한 부활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장차 일어나지 않으면 그 같은 장래의 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고전15:19).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여기서 ‘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데멜리오스’로 ‘밑에 까는 것’을 의미하는 낱말로 ‘기초’, ‘근거’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여러 번 쌓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한번 닦은 신앙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 아니라, 닦여진 그 기초 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서 그 집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 절에서 저자가 독자에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세례들과 안수, 부활과 심판에 관한 표훈들은 이미 성도가 처음 복음의 진리를 접했을 때 배우고 확신한 신앙의 기본 진리다. 그런즉 신앙의 연륜이 깊은 성도는 젖 먹는 어린아이와 같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배우고 깨달은 바를 굳게 믿고 믿음에 합당한 삶과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절)
여기서 ‘이것’은 신앙의 성숙을 가리킨다. 신앙의 기초를 닦고 그 위에 집을 짓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는 것이지만, 그 행위의 배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저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2절에서 ‘완전한데로 나아가자’고 권면한 것이다. 본 절에서 저자는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가고자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허락 없이는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약/적용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히6:1)“ 아멘!

본 절에서 주목할 단어는 ‘너희가’가 아니라 ‘우리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와 같은 의미로
기독교 기본 진리 중에서도 매우 기초적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본 진리를 바탕으로 더 높은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또한 ‘죽은 행실’이란 말은 물리적인 관점에서 사용된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말이다.
인간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살아있다 할지라도,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 된 행동인 경우
그의 결국은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이다(롬6:21,23).
저자는 그 같은 악한 행동을 가리켜 ‘죽은 행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덕목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심령에 진정한 믿음이 없다면
그는 불신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2019/11/18   

대표선교사
 ::   배교의 죄에 대한 경고!
(히6:4-8)
◆본문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해석과 설명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4절)
‘한 번 빛을 받고’
1-3절에서 신앙성숙에 관해 권면한 저자는 4-8절에서는 신앙을 저버린 배교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그결과는 곧 구원을 얻기 못하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시에 영원한 형벌을 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본문은 본서의 독자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소위 그리스도를 믿노라하는 자들 중에도 멸망에 빠지는 자가 있을 수 잇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박해와 위협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각종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당해 배교하는 자들이 있었다. 더구나 개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에 되돌아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저자는 교회를 떠나 배교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팍스’는 ‘단 한번’이라는 단회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빛을 받다’는 말은 복음의 진리에 접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배교자들은 지식적으로만 복음의 진리를 알았을 뿐이지 성령에 의해 진정으로 믿고 깨달아 중생을 얻은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여기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다’는 문맥의 전후를 비추어 보아 이것은 성령의 여러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고전12:4-7, 27-31). 하지만 배교자들은 이러한 은사를 표면적으로만 맛돔 것처럼 보였을 뿐 진정한 체험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했던 것이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다’는 앞의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한편, 참된 그리스도인은 배교자드ᅟᅡᆯ과 달리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들을 아주 부인하고 완전히 타락하여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이를 가리켜 ‘성도의 견인(堅忍-끝까지 견딤)’이라고 한다.
☀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다섯 번째 교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이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7:1)
성경은 성도의 견인(堅忍)에 관하여 분명히 가르친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 심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의 일 을 포함함]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 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 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5절)
‘하나님의 선한 말씀’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신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고 의롭게 하며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선한 말씀’인 것이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여기서 ‘내세의 능력’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장차 그분이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엣 누리게 될 영생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같은 영생을 보장 받고 있는 자들이다(롬6:17-23)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여기 ‘타락한 자들’에서 ‘타락하다(헬,파라핍토)’는 ‘곁길로 새다’는 뜻을 가진 동사다. 그러므로 ‘타락’이란 하나님께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영원히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의 신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세상 교회 안에는 명복상의 신자와 참 된 신자들이 혼재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추수하기 전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자란다’고 하신 바 있다(마13:24-30). 한편,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성도들은 비록 육신이 연약하여 종종 죄를 범할지라도 성령께서 강권하시는 역사로 인해 다시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참된 성도가 아닌 자는 근본적으로 그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회개에 이를 수 없다. 더욱이 표면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도 배교한 자는 악한 본성으로 고의로 성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로 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학자들은 이 말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12:31)’로서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5:16)라고 여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범죄 이래 죽음이 형벌 아래에 놓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속 죽음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배역하는 것은 과거에 유대인들이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과 같은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능멸하는 죄악이므로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7절)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자가 심판당하는 것이 마땅함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7-8절에서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인간을, ‘자주 내리는 비’는 항상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합당한 채소’는 구원의 선한 열매를 상징한다. 하늘이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것에 걸맞게 인간이 많은 선한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더욱 큰 복을 내리실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8절)
여기서 ‘가시와 엉겅퀴’는 쓸모없는 열매를 상징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뜻에 반하는 죄의 열매들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만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름과 불을 주었는데도 이와 같이 쓸모없는 작물을 낸다면 농부는 그 작물들을 태워 버릴 뿐 아니라, 그 땅도 갈아엎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배교의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결국 최후 심판 날에 그를 불살라 버리고 말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요약/적용
◦배교의 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 아멘!

본문은 배교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그 결과는 곧 구원을 얻기 못하고 최후 심판 때에 영원한 형벌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 소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하는 자들 중에도
멸망에 빠지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본문의 배경에는 초대교회 당시에 박해와 위협에 굴복하거나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당해 배교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에 되돌아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저자는 배교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다’는 문맥의 전후를 비추어 보아
이것은 성령의 여러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배교자들은 이러한 은사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없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배교자들과 달리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들을 아주 부인하고
완전히 타락하여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이라고 한다.
한편,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장차 그분이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엣 누리게 될 영생을 말한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같은 영생을 보장 받고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와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란 말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을 맛보고도 배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12:31)’요,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5:16)‘’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능멸하는 죄’다.
그런데 어찌 죄 사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2019/11/21   

대표선교사
 ::   인내함으로 소망 가운데 얻는 승리!
(히6:9-20)
◆본문
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해석과 설명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9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여기서 ‘사랑하는 자들아’는 3:1의 ‘거룩한 형제들아’와 같은 수신자들에 대한 호칭으로 보다 더 정감 있는 표현이다. 저자는 4-8절에서 배교하는 죄의 무서움에 대해 언급한 뒤, 본서의 수신자들은 그런 명목상의 신자들과는 다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중요한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해 이 같은 애정 어린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여기서 ‘이 보다 나은 것’은 4-8절에 언급된 배교자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자들인 것과 달리 본서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고 있는 자들임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구원에 속한 것’은 본서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구원 받은 자들임을 의미한다. 한편, ‘확신 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본 절 맨 앞에 놓여 있어 매우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1-8절에서 본서 수신자들에게 성숙한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하며, 배교할 경우 맞게 될 무서운 결과를 경고한데 이어 이제 이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본서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임을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10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미쁘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평하시고 신실하셔서 선한 열매를 맺는 성도에게는 그에 대한 보응을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다.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독교 최고의 덕목임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합2:4, 롬1:17). 그러나 성경은 또한 믿음에는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동시에 강조한다(약2:14-26). 게다가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되 선악간에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심을 증거하고 있다(고전3:8, 벧전1:17, 계2:23).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열렬히 바라다’는 뜻으로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애정 어린 간절한 소원을 의미한다. 저자는 아직도 유아적 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히 믿음의 장성한 신앙에 이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여기서 ‘동일한 부지런 함’은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10절)과 같은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힘쓰라는 의미다. 즉 이는 성도가 장차 얻게 될 영생에 대한 그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힘쓰라는 말이다. 이는 곧 성도들이 믿음에 걸 맞는 선한 행실과 믿음 안에서 참된 소망을 온전히 갖추게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앞에서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붙들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자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한편, ‘풍성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포리안’은 ‘충만하다’는 의미로, 따라서 ‘소망의 풍성함’이란 영생에의 소망이 마음속에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저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영생에 이를 때까지 이 같은 마음 상태를 계속 견지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절)
‘게으르지 아니하고’
여기서의 ‘게으름’은 영적으로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드로스’는 5:11에서 ‘둔하다’로도 번역되었다. 게으름은 인간의 창조적 기능을 무력화시켜 인간의 전인격적인 성장을 방해할 분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되는대로 살게 만드는 해악을 끼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에 게을리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인 하늘 가나안 곧 천국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생에 멀어지게 될 뿐이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이는 어떠한 역경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인내를 가리킨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이 이제까지 저자가 여러 말로 본서 수신자들을 권면한 핵심 요지다. 저자는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직 부지런함으로 믿음에 장성한 성도가 되라고 권면한 것이다. 여기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이 구원의 약속을 받아 믿음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진 믿음의 선진들을 지칭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 받고 또한 수많은 자손을 축복을 받은 자로서 구약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다(창12:1-4). 이러한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구약 선민에 대응하는 신약 선민인 교회, 즉 모든 믿는 성도들의 조상이 된다(롬4:11, 16).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과 관련하여서는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이 예로 제시되고 있다(히11:8-10, 롬4:1-25).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여기서 ‘맹세’란 말하는 자의 약속의 신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신실한 대상을 결고 언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결국 본 절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없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구원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영원불변의 약속임을 강조해 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오늘 날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구원 약속 또한 확고 불변한 것이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14절)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본 절은 창22:17 상반절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은 13절의 ‘맹세’라는 말과 상응한 것이다.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하지 아니하시고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민23:19)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확고한 약속이다. 한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창12:7)과 자손에 대한 약속(창22:17)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래와 같이 번성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됨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성도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 기업으로 받게 될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본 절이 말하는 ‘복’과 ‘본성’은 궁극적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구원을 받을 것을 뜻한다. 사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만큼 큰 복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 이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은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절)
이것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서야 아들 이삭을 낳은 사건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난 대는 그의 나이 75세 때였다(창12:1-4).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아들 이삭을 얻었으며(창21:5), 그 아들을 얻은 지 60년이 지나서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을 얻었다(창25:26-2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 참는 중에 약속 성취를 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성취가 아닌 일부만을 보았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완전한 약속 성취를 믿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16절)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는 일체의 쟁론을 정지시키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같은 맹세는 쟁점이 되는 일의 진실성을 하나님의 진실성과 절대 불변성에 의지하여 주장하는 최후 수단이자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삿11장 30-31절 (사사 입다가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는 맹세를 지킨 이유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한 언약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 불변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17절)
여기서 ‘보증하다(헬,메시튜오’)는 ‘중재하다’, ‘중보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약속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약속을 보증하는 중보자로 세우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실 때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했다(13절)는 말이 이 점을 뒷받침 해준다.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약속의 중보자로 삼으셨으니 그 약속의 성취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이 본 절의 요지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이는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그 자체로서도 변치 않을 언약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맹세까지 더해졌음으로 그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의 사실로 확정된 셈이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앞에 있는 소망’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장 받고 있는 영생의 소망을 가리킨다. 그리고 ‘피난처’는 구약에서 우발적인 살인죄를 범한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도피성으로 피신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신4:4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우상을 숭배하는 땅, 갈대아 우르를 피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던 것처럼,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인 성도들은 죄악의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향해 가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 이 나나님의 맹세의 약속은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19절)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흔히 세상을 바다로, 인생을 그 바다의 항해하는 배로 비유한다. 본 절도 저자가 이런 문학적 표현을 통해 성도의 삶을 적용한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성도의 삶을 거친 바다를 항해 나가는 배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험한 바다는 거친 풍랑으로 성도라는 배를 침몰시키고자 하나, 미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불변하는 언약의 소망의 닻을 성도에게 주셨음으로, 성도는 그 닻에 의지해 결코 파선당하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영혼의 닻’이란 성도의 궁극적 구원, 즉 영생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의미한다.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여기서 ‘튼튼하고 견고하여’는 18절의 ‘변치 못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곧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믿을 만한 불변의 진리라는 의미다. 또,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는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를 의미한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로서 일 년에 한번 대속죄 일인 7월 10일에 대제사장만 들어 갈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순간 지성소 앞 휘장이 찢어졌다(마27:51). 이는 곧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 ‘휘장 안’은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20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여기서 ‘앞서 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드로모스’는 ‘첩자’, ‘척후병’, ‘선구자’라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친히 화목 제물로 바치심으로(롬3:25, 요일2:2)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앞에 나간 선구자가 되셨다(마27:51). 그리고 그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힘입어 성도들은 장차 그리스도 재림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참되고도 유일하신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이다. 자기 죄를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자기 백성의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해마다 속죄일에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속죄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하는 온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는 길을 열어 놓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것이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들과 멜리세댁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다. 즉 전자는 임시적이고 모형적인데 반해 후자는 영원하고 실제적인 것이다. 한편 이처럼 저자가 구약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이유는 유대교도들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며 이 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진리를 믿는 기독교야말로 구약의 정통 신앙을 계승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당시 다시 유대교에 되돌아가려고 하던 유대인 출신 개종한 성도들에게 배교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로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성도들은 이 사실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인 우리 모두의 죄를 속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장차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당하셨으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요약/적용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히6:14-15)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멘!

본 절은 창22:17 상반절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은 13절의 ‘맹세’라는 말과 상응한 것이다.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하지 아니하시고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민23:19)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확고한 약속이다.
본 절이 말하는 ‘복’과 ‘번성’은 궁극적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구원을 받을 것을 뜻한다.
사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만큼 큰 복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 이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은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서야 아들 이삭을 낳은 사건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난 때는 그의 나이 75세 때였지만
25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아들을 얻었다(창21:5).
이처럼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 참는 중에 약속 성취를 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성취가 아닌 일부만을 보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한 마디로 ‘영적 부흥’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부흥을 이루는 저와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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